1. 기준의 필요성
모든 일에는 기준이 필요해. 그것도 정확한 기준이 필요하지. 그러한 기준이 없다면, 정말 우리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거야.
예를 들어, 우리 집에 가구를 하나 들여놓으려고 해. 그런데 방 사이즈에 적절한 가구를 장만해야 하는데, 그 길이를 잴 수 있는 자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실컷 가구를 구입했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아 곤란해 지겠지. 그래서 미터법이 필요해. 정확하게 몇 cm인지 사이즈를 재고, 거기에 맞는 가구를 구입한다면 문제가 없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기준이 필요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 알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해. 그런 기준이 없다면, 실컷 수고했는데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다윗이 법궤를 가져오려고 했을 때였어. 소가 끄는 마차에 법궤를 싣고 이동시켰지. 그런데 가는 길에 덜컹거리는 거야. 그래서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를 잡았어. 떨어지면 안 될 거니까. 그러니까 웃사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줘야 할 것 같잖아?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거야. 그래서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렸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사실 성경에 보면 법궤를 다룰 때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그런데 그걸 무시한 거였지. 마음은 순수하게 법궤를 보호하려는 것이었겠지만,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 거야.
이런 일들이 많아. 복어 요리를 한다면, 복어 요리법을 따라야 해. 그래야 복어 독에 의해 피해를 당하지 않아. 버섯을 식용으로 쓰고 싶다면, 어떤 버섯이 독버섯인지 어떤 버섯이 식용버섯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해. 다 기준에 따라 해야 안전한 거야. 그런데 그런 기준을 잘 모르고 무턱대고 덤볐다가, 화를 입을 수 있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야. 기준이 있어. 기준이 필요해.
2. 성경만이 최고의 기준
그래서 우리들에게 기준이 필요한데.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한 최고의 기준은 성경이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말씀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 해. 다른 것은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되지 못해. 오직 성경만이(sola scriptura) 기준이 되는 거지.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천주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성경을 연구하면서 알게 되었지. 중세 시대에 교회에서 가르쳤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들이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야. 특히 성경에서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solus Christus) 믿음으로(sloa fide), 아무런 우리의 공로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sola gratia)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었어. 당시 중세교회는 헌금을 드려야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쳤거든. 면죄부라고 불리는 것을 돈을 주고 구입해야, 연옥에 있는 부모님들이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했었어. 이러한 가르침은 헌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는 데 유용했지만, 전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지.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에 근거해서 다시 교회를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고, 우리는 그 연장선 상에 있는 거야.
왜 그렇게 중세교회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그것은 신앙을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지 않고, 사람들의 교훈 위에 세웠기 때문이야. 기준이 잘못되다 보니, 결국 엉터리 신앙이 되고 만 거지. 우리도 언제나 잘못될 가능성이 있어. 줄을 일정한 간격으로 자르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자르다 보면, 처음에는 원래의 샘플에 맞추어 자르니까 그런대로 비슷한 크기로 자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짧게 자르거나 길게 자르게 되지. 그것은 기준을 보고 만든 것을, 보고 만든 것을, 또 보고 만들면서, 자꾸만 오차가 생기기 때문이잖아? 그러기 때문에 내가 자르는 것이 원래의 샘플과 오차가 있는지 늘 다시 비추어보아야 해. 그래야 잘못을 줄일 수 있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으로 늘 다시 돌아가야 해. 그걸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이라고 해. 성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원천이기 때문에, 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지.
3. 기준이 될 수 없는 것들
성경만이(sola scriptura) 우리의 참된 기준이라는 말은 그 외에 그 어떤 것도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야. 예배 시간에 담임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될 수 없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떤 크리스천 작가의 책도 기준이 아니야. 믿음이 좋아보이는 어떤 권사님이나 장로님의 권면도 최고의 기준이 될 수 없지. 맞아! 여기에 써 있는 내용도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어. 성경이라는 최고의 기준 아래에 있는 것이기에, 혹시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것이 있다면 교정되어야 하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이 아닌 것들이 마치 최고의 기준인 양 위세를 떨쳐왔었지. 그게 안타까운 역사였고, 지금도 그런 일들이 반복될 수 있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구전 율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어. 즉 선조들로부터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이었어. 그걸 “장로들의 전통“이라고도 불렀지. 그런데 그 당시에 그 구전 율법이 기록된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 구전 율법이라는 게 성경을 풀이한 것이니까, 그렇게 받아들인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 해. 마치 오늘날 성경을 풀어서 설교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아멘” 하면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했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비판하셨지. “그러면 너희들은 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거야? 전통을 들먹이면서.”(마 15:3) 중세 시대에는 교회의 결정을 최고로 생각했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내용을 가르치기도 했어.
따라서 최고의 기준이 성경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오로지 성경적인 근거가 있을 때에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해. 예배 시간에 들려지는 설교 메시지도 100% 다 받아들일 게 아니야. 그 속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내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 실수로 그렇게 될 수 있기도 하고, 더 심각하게는 의도적으로 가짜 교훈을 전할 수도 있어.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설교가 평가되어야 하고, 무조건 설교를 다 받아들일 게 아니라, 분별해야 해. “영들을 다 믿지 마. 그가 하나님께 속했는지 따져 봐야 해. 이 세상에 정말 많은 거짓 예언자가 판치고 있으니까”(요일 4:1)라고 하셨거든. 신앙서적이든, 신학서적이든, 유튜브 영상이든, 유명한 목회자의 설교이든, 유명한 신학교 교수의 말이든,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것은 아니야. 심지어 교회가 전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앙고백서도 마찬가지야. 오로지 그 모든 것들이 성경에 근거가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거야. 만의 하나 잘못이 있을 수 있으니, 항상 성경만이 최고의 기준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해.
4. 기준이 아니라는 표현의 의미
성경만이 최고의 기준이며, 다른 그 어떤 것도 기준이 아니라는 말은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야. 그러니까 이 말은 설교든, 신앙서적, 신학서적, 교리서 등등이 전혀 쓸모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야. 오히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들이 절실히 필요해. 왜냐하면 성경은 방대하고,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지. 따라서 그 성경을 잘 정리하여 우리들에게 들려줄 유능한 사람들이나 책 같은 것이 필요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풀어서 설명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고, 성경의 의미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여러 신앙서적이나 신학서적도 필요하지. 신학교에 가서 말씀을 잘 배우는 일도 필요해. 역사적으로 믿음의 선조들이 정리해놓은 전통적인 신앙고백서들도 우리가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잘 정리된 신앙고백서 등을 통해서 배워야 해. 그것들은 성경이라는 방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니까. 특히 신앙고백서 같은 것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검증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의 신뢰를 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어. 이러한 과거의 유산들을 무시해버리고, 새롭게 내가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 발견하려고 한다면, 어리석고 무모하다고 할 수 있지.
어린이는 부모님의 가이드를 잘 따르는 게 옳지? 부모가 어린이보다는 인생을 더 많이 경험하고, 그래서 무엇이 더 나은지를 잘 알고 있고, 어린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를 신뢰할 수 있어. 이와 비슷하게 지금까지 교회가 사용하던 대부분의 신앙고백서나 영적인 자료들은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성경과 같거나 능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은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부모도 실수를 해. 아이에게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이에게 해로운 것을 줄 수 있어. 부모가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일 수 없는 이유이지. 한계가 있어.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이외의 모든 것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을 수 있어.
5. 그럼 무엇이 성경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그래서 도합 66권이야. 그런데 유대인들은 구약 39권이 성경이라고 생각하지. 신약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야. 천주교에서는 73권이 성경이라고 그래. 천주교의 구약은 39권이 아니라, 46권이거든. 몰몬교에서는 성경책에 몰몬경을 추가시켰지. 이슬람교에서는 성경책에 이슬람 경전까지 포함시켰지. 그렇다면 어느 성경이 진짜 성경일까? 도대체 성경이라는 것을 누가 정하는 거지? 어느 책이 성경에 포함되고 포함될 수 없는 기준은 무엇이지?
사실 어떤 책이 성경인가 아닌가를 구분할 필요가 생긴 것은, 우선 성경이 아닌 책을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불거진 문제야. 원래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 성경이 쓰여지면, 그 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졌었지. 그런데 나중에 성경책이 아닌 책이 슬며시 성경인 것처럼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거야.
마치 어느 집에 불쑥 어떤 사람이 찾아와, “나도 이 집 자식”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과 비슷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아이는 아빠 엄마의 자식이지. 그것으로 끝이야. 일반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이 그냥 그 가정은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나도 이 집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혼란스럽지. 그래서 그 사람이 진짜 이 집 자식인지 확인해야할 필요가 생겼어. 감사하게도, DNA 검사 같은 것이 있지. 그래서 쉽게 친자 확인이 가능한 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엇이 성경책인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DNA 검사 같은 것은 없어.
뿐만 아니라, 어떤 책이 성경인가 아닌가를 구분할 필요가 생긴 것은, 이건 성경책이 아닌 것 같다고 의심하면서 불거진 문제야. 그렇게 의심해왔던 일이 많았어. 예를 들어, 전도서나 아가서 같은 책은 과연 이게 성경일까 의심을 받곤 했지. 말시온이라는 사람은 구약은 잔인한 하나님을 보여준다면서 거부하고, 오직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의 일부만을 성경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마치 어느 집안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 아이를 향해서 “넌 다리 밑에서 줏어 온 아이야”라고 말하는 일이 발생한 셈이지. 이런 저런 이유로 무엇이 성경인가,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긴 것이지.
천주교에서는 교회의 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1548년 트렌트에서 모인 종교회의에서 73권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게 성경이라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사람이 결정한다고 해서 성경이 되는 건 아니야.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 들여져 왔어. 구약 39권이 그랬어. 천주교에서 받아들인 7개의 제2경전은 예수님 시대 이전에 한번도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어.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당시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그 당시 널리 알려졌던 헬라어 작품 7개도 포함시켰지. 그래서 구약의 헬라어 번역판인, 칠십인경(LXX)에 포함되었어. 하지만 그렇게 포함되었다고 해서 성경이 되는 건 아니야. 유대인들은 오로지 구약 39권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여 왔어. 한번도 7권을 성경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어. 신약성경에서 그 7권을 성경으로 인용하지도 않아. 그런데 A.D. 400년 경에 히에로니무스(Jerome)이라는 사람이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칠십인경(LXX)에서 번역하다보니 라닡어 성경에 포함되었던 거야. 사실 7권의 내용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런 내용도 나오지 않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써 있는 것과는 다르지.
결론적으로 구약 39권, 신약 27권이 우리가 믿고 따를 성경이야. 그 외의 다른 것을 추가해도 안 되고, 이 가운데서 어떤 것을 빼도 안 돼.
6. 하나님의 말씀, 인간의 기록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사실 그 성경을 하늘에서 뚝 떨어트려 주신 것이 아니야. 그 말씀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어. 모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고, 바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고, 다윗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한편으로 성경은 100% 인간 저자의 작품이지. 그러면서 동시에 100% 하나님의 말씀이야.
인간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에는, 일종의 환상 속에서 자기의 의지가 없이 그저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대로 글을 써내려간 게 아니야. 정 반대야, 마치 우리들이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100%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으로 글을 써내려 갔어. 예를 들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라는 사람이 쓴 글로 알려졌는데, 누가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자세히 조사를 하고 연구를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최선의 정보를 이용하여 이 글을 썼다고 고백하고 있어(눅 1:1-4). 그러다 보니 각각의 성경책은 인간 저자의 특성이 그대로 번영되어 있어. 이걸 가리켜,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해. 유기적 영감설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온전한 특성을 잘 사용하여서 성경을 쓰게 하셨다는 것으로, 인간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고 그냥 기계처럼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기계적 영감설과는 다른 것이지.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쓴 글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잖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셔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게 하셨지. 그래서 우리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 되었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표현해. 디모데전후서 3:16에서 이렇게 표현하지.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 넣어주신 거야. 그래서 교훈, 책망, 교정, 의로 양육하기에 유익해.” 이걸 가리켜, 축자적 영감설이라고 해. 성경에 어떤 부분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오로지 영적인 진리만이 영감을 받았다는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야.
7. 성경의 해석
문제는 이 방대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야. 안타깝게도 같은 성경을 가지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면서, 사람들은 갈라져 버렸어.
우선 성경은 정상적으로 해석해야 해.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100% 인간 저자가 쓴 글이거든. 우리가 어떤 문서를 해석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경도 해석해야 해. “아침에 해가 떴습니다.”라는 글이 있다면, 이 문장의 뜻은 문자 그대로 아침에 하늘에 해가 떴다는 뜻이야. 우리가 평상시 글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성경도 이해해야 해. 마치 이런 문장 속에 어떤 심오한 뜻이 있는 양,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면 안 돼. 성경은 그냥 일반적인 문서를 해석하는 방법을 사용하면 돼. 그게 유기적 영감설이 시사하는 바야.
더 나아가 성경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 속에서 조화롭게 해석되어야 해(tota scriptura). 성경은 어리석은 자의 말에 따라 대답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어(잠 26:4). 그러니까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하면, 무시해버리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야 할까? 그렇지 않아. 왜냐하면 바로 다음 구절에 대답하라고 권고하는 말씀이 있거든(잠 26:5). 그러니까 어느 한 구절만 읽고 그게 전부인 양 생각하면 안 돼. 성경에는 암몬 민족과 모압 민족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어(신 23:3). 그러니까 모압 민족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까? 그 구절만 보면 그럴 것 같아. 하지만, 모압 여인 룻이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었잖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도 했고? 성경 어느 한 구절만을 볼 게 아니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들어야 해.
또한 문화적인 표현인지 영원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해. 입을 맞추면서 인사하라는 구절이 있는데(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 살전 5:26; 벧전 5:14), 오늘날에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왜냐하면 그건 그 당시 그 지방의 인사법이었거든. 그 말의 의도는 인사하라는 데 방점이 있는 것이지, 입을 맞추는 데 있지 않아.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과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했던 잘못된 관습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해. 예를 들어, 일부다처 풍습은 믿음의 선조들도 행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 이러한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으면 성경을 오해하게 돼.
또한 성경의 1차적인 독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점도 고려해야 해. 예를 들어,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이야. 아브라함이 1차적인 그 말씀의 수신자야.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야. 우리에게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2차적으로 들려주는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필요해.
아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요구와 조건들을 성취하셨다는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해. 따라서 더 이상 우리는 할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어졌어. 구약에 있는 여러가지 제사들을 지금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 주님께서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이야. 구약의 의식법적인 규정들은 이제는 더 이상 문자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어. 뿐만 아니라, 우리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 체계 속에 있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해.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것은 영원 불변한 도덕법적 규정이지. 하지만 그렇게 도둑질을 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는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 체계 속에서 지켜졌던 규정들이야. 지금 우리는 그런 신정국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시민법적 규정들도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없어.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것은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해. 이국진 목사의 성경 해석학 강좌를 추천하니, 영상으로라도 배우면 좋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