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성경이 뭐야?

“풀이성경”은 “성경”이 아니야. “풀이성경”은 “성경”을 풀어서 설명한 성경학자의 생각과 의견일 뿐이야. 따라서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성경”은 오직 원문 성경뿐이야. 성경 원문에만 최종적인 권위가 있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해. 설교도 교리도 신조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야.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적절하고 안전한 가이드이긴 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성경의 권위와 같아지거나 넘어설 수는 없지. 그런 의미에서 “풀이성경”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지.

그렇다면 왜 “풀이성경”이야? 그건 아주 간단해. 원문 성경을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이야.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신하도 이사야서를 읽었지만,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래서 전도자 빌립이 그에게 가서 설명해 주었지.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깨닫게 되었어. 그게 우리에게 풀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야. “풀이성경”은 빌립과 같은 마음을 가진 성경학자가 세심하게 설명하여 풀이한 성경이야.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야. 사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거기서 살고 있을 때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어. 안타깝게도 당시 유대인들은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말았지. 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였는데, 그들은 히브리어를 몰랐어. 그들의 언어가 아람어로 바뀌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회당에서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고 난 뒤에는 랍비가 아람어로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었어. 그제서야 비로소 성경의 뜻을 깨닫게 된 거지.

그때 성경을 아람어로 설명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 그게 바로 탈굼(Targum)이라는 거야. 탈굼은 그냥 히브리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게 아니야. 거기에는 랍비들의 설명이 엄청 첨가되었지. 성경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었어. “풀이성경”은 한국판 탈굼인 셈이지.

사실 매 주일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모두가 이런 시도의 일환이지. 성경을 풀이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하나의 설명이라 생각하고 참고하면 돼. “풀이성경”이 경전으로서의 성경을 대치할 마음은 없어. 그래서도 안 되지. 그냥 성경을 설명한 것뿐이야. 성경을 읽다가, 이게 무슨 뜻일까 궁금할 때, 그때 펼쳐보면 도움이 되는 게 있을 거야. 물론 “풀이성경”을 처음부터 차분히 읽어나가는 것도 아주 큰 도움이 되겠지. 원래 교과서보다 친구의 설명이 이해하기 쉬운 때가 많잖아?

사람의 작업이라 “풀이성경”에도 잘못된 풀이가 있을거야. 진리는 사람의 머리보다 훨씬 더 커서 사람이 다 이해하긴 어렵거든. 그러니까 사람의 풀이에는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게 마련이지. 그럴 때에는 분노하지 마. 성경에서 분노를 좋게 말하는 적은 거의 없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게 있으면, 알려줘. 얼른 살펴보고 정당하다면, 수정에 반영할 게. 어떻게 제보하냐구? 여기를 눌러서 제보하면 돼. 제보를 통해 “풀이성경”이 좀 더 완벽해지게 도와준 분들의 이름은 여기에 기록으로 남길 거야.

그런데 왜 반말이냐구? 친해지려고 그래. 존대말을 하면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있잖아? 정말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특히 성경이 먼 외계인의 글처럼 느껴지는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청소년에게 하는 말을 내가 옆에서 슬쩍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은 편할 거야. 그게 별로 마음에 안 든다면 할 수 없지만. 조금만 이해하고 같이 지내다 보면, 재미 있을걸? 사실 신약 헬라어는 시장바닥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였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 쓰던 고전 헬라어가 아니었다구. 그만큼 밑바닥 인생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기록된 거지.

누가하는 작업이냐구? 아직은 누군지 말하지 않을 게. 왜냐하면 내용 자체로 평가를 받고 싶기 때문이야. 때가 되면 누군지 알게 될 거야. 물론 인터넷 고수들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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